왕정치의 위대한 야구 인생

일본야구 2009. 5. 23. 11:08 Posted by 쏘왓의 야구블로그

Sadaharu Oh Was A Major Hit
Miho Nagano


이치로 스즈키가 미국에서 유명해지기 전에,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팬들의 주목을 받았었던 또 다른 일본 야구선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 사다하루 오이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868개의 홈런을 기록한 야구의 홈런 왕이다 - 베리 본즈나 행크 아론보다 많은 홈런이다 -- 사다하루 오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홈런왕이 되었다. 그는 왼쪽 발을 고정시킨후 스윙을 하기전 오른쪽 발을 높이 들여 올렸었다. 야구 팬들은 플라멩고 타법이라고 불렀었다.

배팅의 정확한 순간을 감지하기 위해서 오는 사무라이 검으로 배팅 연습을 했었다. 그는 공중에 신문을 매달아 놓은 앞에 서서 신문의 회전이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 신문의 절반을 검으로 베었었다.

그의 도인 스타일 같은 집중력과 끊임 없는 노력, 그리고 오의 야구기록만으로는 그를 일본 야구의 가장 위대한 전설로 만들지 못했었다. 그가 일본야구의 가장 위대한 전설이 된 것은 그의 품행때문이었다.

68살의 오 사다라하는 항상 팬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다. 팬들이 그의 사인을 원했을때 그는 사인을 했었다. 1977년 일본 정부는 국민 영예상을 수여함으로써 그에게 보답했었다.

29년이 지난 뒤, 오는 일본대표팀의 감독이 되어 WBC 우승을 이끌었다.

"오 사다하루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가장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입니다." 일본 야구에 관한 책 "You Gotta Have Wa,"를 저술한 로버트 화이트닝은 말했다. "오 사다하루는 최고의 인격을 지닌 사람입니다." 

오는 1940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세계 2차 대전중 중국과 일본이 전쟁중이었던 그때, 그의 아버지는 중국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빈곤층이 사는 지역에서 중국 우동가게를 운영했었다.



야구를 향한 열정
Passion For The Game


오와 그의 형제 테쓰조는 야구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야구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들이 엔지니어나 의사가 되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에게는 맞지 않았었다. 오는 자신의 야구 장비를 집안에 숨겨두었고 야구 연습을 계속했었다.

"내 인생에서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오는 자신의 저서인 "A Zen Way of Baseball."에 썼다.

오는 왼손잡이였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오에게 젓가락질이나 글쓰기를 할때 오른 손을 사용하라고 말했었다. 오가 14살이었던 어느날. 그가 공원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을때 일본 프로야구선수인 외야수 히로시 아라카와가 산책을 했었다.

오의 피칭과 배팅을 본 아카카와는 오에게 다가와 말했었다. "너는 어째서 왼손으로 던지고 배팅은 오른속으로 하는 것이니?"

아라카와는 왼손 타자가 오의 야구경기에 도움이 될것이라는 것을 제안했었다. 오는 끄덕였다. 왼손 타석으로 들어선 오는 깨끗한 2루타를 쳤었다. 

1957년 일본 전국 고교 춘계 토너먼트에서 오는 4일동안 4번의 경기에서 투수로써 피칭을 했었다. 그는 손에 생긴 핏빛 물집으로 고생했었다.

오는 팀 동료들에게 자신의 부상을 숨겼었다. 그러나 오의 아버지는 TV를 보면서 아들의 손가락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의 아버지는 도쿄에서 효고발 기차를 탔다. - 560 킬로가 떨어진 - 오의 아버지는 오의 팀 기숙사에 나타나 오를 놀라게 했었다. 

오의 아버지는 인삼뿌리가 혼합된 중국 와인을 오의 손가락에 발라주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치료방법이었다. "너의 손가락에 대해서 어느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라. 내일 경기에서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서 던져라." 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었다. 

오는 그의 팀이 우승할때까지 피칭을 계속했었다.

결국 일본의 전국 스포츠 페스티벌은 오의 팀을 도쿄 대표팀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오는 경기에 참여할수 없었다. 대회는 일본인만이 참여할수 있었다. 비록 오가 일본에서 출생했지만 그의 핸디캡은 대만 국적이라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았었습니다." 오는 자신이 쓴 책에서 말했다. 오는 그 순간전까지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틀리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것은 오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 요미우리 쟈이언트에서 오의 선수로 플레이했었던 워렌 크로마티는 말했다. "그것은 오가 해쳐나가야할 난관이 아주, 아주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살고 있는 크로마티는 IBD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일본인이 아니고 오는 절반의 일본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본 사회의 새로운 얼굴이 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1958년 오는 요미우리 신문이 구단주인 쟈이언트와 계약했다. 그는 19살이었고 유망주 투수였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오는 1루수로 변경하였고 1루는 오의 커리어 내내 포지션이었다.

1959년. 오는 그의 첫번째 시즌 26번째 타석까지 하나의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었다. 또한 오는 193번의 타석에서 72삼진을 당했었다. 관중들은 오를 비웃었다.

유년 시절 오에게 왼손타자가 되라고 조언했었던 아라카와는 오를 도와주기 위해서 요미우리 쟈이언트의 타격코치로 부임하였다. 아라카와는 신인 선수인 오가 자신의 배트를 견고하게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의 스트라이드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아라카와의 조언은 : 한발로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1962년 요미우리 쟈이언트가 부진했었던 시즌에, 플라밍고 타격스타일이 된 오는 타구를 우익 담장 관중석으로 날려보냈다.

아라카와와 오는 자신들의 일대일 트레이닝을 계속했다. 아라카와 코치는 오가 다다미 매트위에서 스윙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다미 매트는 수천번의 스윙으로 헤어졌다.


선종의 신자였었던 아라카와는 오에게 진 검을 사용하여 배팅 연습을 하는 것을 제안했다. 어느날 아라카와 코치는 말했다. "음.. 우리가 베이브 루쓰의 홈런 기록을 깨트려 볼까?"

오는 웃었다. 그러나 아라카와 코치는 웃지 않았다. "너는 내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농담이 아니야. 우리는 베이브 루쓰의 기록을 깨트릴수 있어." 아라카와는 말했다.

1964년 오는 55홈런을 기록했다. 일본야구 기록이다. 오는 결국 루쓰의 714홈런을 경신했다..
1977년 9월 3일 오는 그의 756번째 홈런을 기록하며 행크 아론의 홈런 기록을 깨트렸다. 오는 9번의 MVP를 수상한 22 시즌에서 868개의 홈런을 기록하였다.

오의 파워에 힘입어 요미우리 쟈이언트는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일본 야구를 완전히 압도하였다. - 1965년 부터 1973년까지 9년 연속으로 우승하였다 -

일본에서 살고 있는 화이트닝은 많은 미국 야구팬들이 오의 홈런 기록을 세계기록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미국야구팬들이 일본 야구의 수준이 낮으며 경기장이 작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 야구팬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크로마티는 논쟁을 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나는 오를 상대로 플레이 했었던 많은 미국 선수들이 오가 메이저리그에서 플레이 할수 있는 선수이며 오가 슈퍼스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직 메이저리그 외야수는 말했다.

크로마티와 동조하는 화이트닝은 재팬 타임스에 기고한 기사에서 오가 기록한 홈런들은 보통 외야 관중석을 맞고 다시 튀어나오는 라인 드라이브 타구였다고 썼었다.



명예의 전당 투수인 톰 시버는 오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는 틀림없이 나의 공을 칠수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타자였습니다. 만약 오가 미국에서 플레이 했었다면 그는 매년 20~ 25개의 홈런을 기록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는 3할을 쳤을 것입니다."


오는 1980년 은퇴하였다. 1987년 오는 요미우리 쟈이언트의 감독으로 팀을 센트랄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오는 후쿠오카 호크스의 감독으로 자신의 우승 타이틀을 추가하였다. 후쿠오카 호크스는 3번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기록하였다.

자신의 아들 이름을 코디 오 크로마티로 지은 크로마티는 오가 쟈이언트의 감독으로서 단 한게임도 경기에 빠진적이 없으며 심지어 오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을때도 경기에 빠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사다하루 오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오와 함께 있었습니다." 크로마티는 말했다. "나는 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은 나와 오의 아주 개인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나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입증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습니다. " 

,
BLOG main image
쏘왓의 야구블로그
스포츠 서울닷컴에서 야구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by 쏘왓의 야구블로그

카테고리

전체보기 (1004)
WBC (52)
메이저리그 (124)
한국야구 (5)
일본야구 (4)
MLB 선수들 설문조사 (26)
박찬호. 추신수 (30)
이치로 스즈키 (73)
빌제임스 필딩 바이블 (8)
06~08 포지션별 수비랭킹 (37)
선수별 수비 챠트 (67)
선수별 홈런비거리챠트 (90)
구장 조감도 (29)
스카우팅 리포트(AL) (16)
스카우팅 리포트(NL) (35)
야구동영상 (121)
MLB 야구기록 (54)
김연아 (109)
ssowhat's view (12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믹시

쏘왓의 야구블로그

쏘왓의 야구블로그's Blog is powered by Tistory
Copyright by 쏘왓의 야구블로그. All rights reserved.

쏘왓의 야구블로그's Blog is powered by Tistory. Designed by Qwer999.